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무대 뒤편으로 물러난다. 아직은 조금 더 무대 위에 남아 있고 싶지만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판 고려장을 당하듯이 뒷방 삼식이가 되어간다. 퇴직자 A 씨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그의 모습을 관찰해보자.
1. 어머니, 꽃구경가요
2016년 10월, 세종 문화 회관에서 있었던 장 사익의 공연. 목소리를 잃었다가, 회복되어 갖는 첫 공연. ‘장사익 노래 판’이라는 제목에 "꽃인 듯 눈물인 듯"이 부제로 열린 2시간의 공연. 장 사익, 나는 지금까지 그를 올바르게 정의하지 못했고 그냥 국악 스타일의 소리꾼 또는 대중 가수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들어 본 그는 "창"하는 국악인도, 그렇다고 가요를 부르는 대중 가수와는 결이 다른 존재였다. 세션으로 등장한 악기들은 해금과 트럼펫이었다. 그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크로스 오버’ 가수였다. 공연이 끝난 후 장 사익의 정체성에 대한 나의 해석은’가장 모던한 한국형 Jazz가수이자 트로트 가객’이었다. 그의 노래를 더 잘 이해하려면 술에 취해 있으면 더 절절 할 것 같았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중얼거리듯, 노래하는 듯 다가온다. 목청이 아닌 가슴으로 노래를 부른다.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은, 한국인 고유의 한과 슬픔을 뱉어낸다. 그의 공연은 세종 문화 회관 보다는 어느 시골 카바레의 작은 무대가 더 잘 어울릴 듯 했다. 그의 대부분의 노래는 슬프다. 그 중에 가장 가슴을 울리는 곡은 ‘꽃구경’이다. 모친을 산에 고려장 시키러 가는 아들과 그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산길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더니
꽃구경 봄 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씩 한 웅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뭣 한데요 아 솔잎은 따서 뭣 한데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일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여기에서 ‘꽃’은 모친을 버리려는 아들의 눈물과 슬픔을 상징한다. 봄날에 꽃은 슬프게도 활짝 피었다. ‘솔잎’은 모친의 배려와 사랑이자 모자의 연을 이어 보려는 의지로 다가온다. 애절함 의 극치이다. 이러한 늙은 부모를 버리는 전통적 의미의 고려장은 존재할까? 치매에 걸린 늙은 부모를 요양원에 모시는 것을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칭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죽음을 전제로 유기하고 방치하는 것은 아니기에 지나친 면이 있다. 선의로 받아들이자면, 우선 상호 선의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고 변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요양병원, 현대판 고려장
생의 마지막 순간에 호스피스 병원 또는 병동으로 옮기는 것은 아직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수녀원에 입회한 이후 30년 동안 호스피스 봉사를 한, 손영순 까리따스 수녀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그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보통 호스피스 병동으로 이관 된 후 평균 입원 기간은 일 주일 정도라고 한다. 질병의 치료는 없이 고통 완화를 위한 모르핀 주사가 유일한 처방이라고 한다. 고통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준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인간 누구나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랑한다” “미안했다”라는 말을 못하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음의 과정은 삶을 포기한 채 마냥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완성해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인정하고, 하나하나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즉,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과거 전통적인 고려장은 현재는 이루어 질 수 없다. 범죄 행위이다. 중증 치매에 걸린 부모를 요양원으로 모시는 것, 삶을 완성하는 의미로 마지막 순간 호스피스 병동으로 이관하는 것 또한 고려장으로 구분될 수는 없다. 하지만 차라리 현대판 고려장의 모습은 실직 가장의 모습에서 더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비자발적이다. 실직도 그러하다. 보기 드문 호상이라는 정년퇴직 또한 법이라는 테두리 하에서의 비자발적 실직이다. 셀러리맨들은 나는 아니고 (Not Me) 그리고 지금은 아니라는 (Not Now) 착각 속에 스멀스멀 다가오는 실직/퇴직을 먼 미래 남의 이야기로 여기며 살아 온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사회와 조직에서 버림을 받는다. 퇴출된다. 둘째, 그들은 쓸모 없는 낙오자, 버림을 받은 자, 용도가 폐기되고. 유효 기간이 만료된 자들로 여겨진다. ‘분리 수거 대상’이며, ‘재활용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3. A씨의 퇴직 이후
53세 A씨. 회사의 구조 조정을 통해 명예 퇴직을 했다. 말만 명예스러운 것이지, 실상은 사전에 명단과 인원 수가 정해진 명예스럽지 않은 퇴직이다. 임금 피크를 택할 수 있었지만, 후배들을 위해 용퇴하라는 인사부의 압력과 본인의 자존심은 명예 퇴직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실직 후 A씨는 두문불출한다. 가능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직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우선 아파트 경비 아저씨이다. 언젠가부터 아침에 출근하는 A씨의 모습을 볼 수가 없고, 대낮에 담배 피러 한 두 번 밖에 나서지 않는 A씨의 모습만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아마 세탁소 아저씨다. 매 주 한 번은 양복 드라이를 위해 수거와 배달을 위해 들르기 때문이다. 양복을 맡기지 않는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거다.
백수, 울지 않는 핸드폰, 개밥에 도토리
퇴직 후 거의 한 달 동안은 “백수 과로사”를 경험한다. 연속되는 송별회 때문이다. 밤에 출근하는 이들의 고충이 이해가 된다. 한 달여 후부터 시간의 속도는 멈추었다. 휴대 전화를 물끄러미 쳐다 보는 습관이 생겼다. ‘울지 않는 핸드폰’에 많이도 마음이 상했다. 한 낯에 동네 거리를 걷는 것도 주눅이 든다. 유리 실험실 속에 갇힌 자신을 모두가 관찰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네 체육관에 가서 땀을 빼 보아도, 아줌마들 사이 ‘청일점’의 모습이 아닌 ‘개밥에 도토리’가 되어 버린 듯하다. 아니 ‘개밥’이나 ‘개’가 된 듯했다. 스팸 메일을 신고하거나 지우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은 정기적이건, 부정기적이건 찾아 주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선배나 후배에게 전화를 걸기가 망설여 진다. 혹시나 폐를 끼칠 것 같고, 무슨 부탁을 위해 전화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싫어서 였다. 차선은 문자를 보내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 지인들에게 톡을 보내 보아도 1자가 없어지지 않거나, 없어져도 답이 없다.
삼식이
삼식이가 되어 버린 본인이 점점 초라해 진다.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 큰 아이와 대학을 마치지 못한 둘째의 얼굴을 쳐다 보기도 부담이 간다. 곡간에서 곶감 빼먹 듯 통장의 잔고는 줄어만 간다. 아직도 국민연금 수령 가능 기한인 65세까지는 족히 10여년을 기다려야 한다.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이유를 찾기 힘든 나날이다. 예전에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수용된 중죄인, 주로 지식인과 정치범, 에게는 육체적으로 가장 쉬운 노동을 시켰다고 한다. 수용소 마당에 벽돌을 쌓고 허무는 과정을 날마다 반복하게 했다고 한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이러한 벽돌 쌓기 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은 대부분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노동은 인간의 삶의 의지 마저 허물고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A씨의 무의미한 일상이 그러했다.
요즘 뭐하니?
대학교 동기 모임에 간만에 나갔다. 그것도 상당한 용기를 내어서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가,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 버린 본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들 하이 톤으로 그간 있었던 과거의 이야기들을 되새김질 하고 있다. 다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강남 좌파 이야기든, 수구 골통의 이야기든, 건강의 문제든, 그들은 승부를 하고 있었다. 의도적인지, “요즘 어떠니?” 라는 질문은 상실되었다. 서로 궁금하지 않은지, 아니면 금기로 정해놓은 듯했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50대가 해서는 안된다는 금기어 들이 생각났다. “요즘 뭐하니? 아이 대학은? 취직은? 결혼은?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말은 “애는 잘 사니?” 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질문에 당당히 답변할 수 있는 이들이 무심코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다행히도 단 하나의 질문도 나에게 건네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한편 숨이 막혀 왔다. 그들의 대화에 단 일 순간도 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구인이고, 나는 초대 받지 못한 외계인이었다. 자리를 조용히 빠져 나왔다. 다행히도 나라는 존재의 부재를 인지한 친구는 없었다. 버스를 올라 잠깐 졸았나보다.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 “이 양반아, 종점 이야. 내리셔 야지” 하는 기사의 거친 말에 잠에서 깨어났다.
4. '쓸모'가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 남는 법
우리 사회에서 실직 가장들이 겪을 만한, 겪고 있는, 그리고 있음직한 가상의 이야기다. 현재와 미래의 A씨들에게 다음의 이야기를 전헤 주고 싶다. 조금은 담담하게 준비하고 상황들을 마주하라는 의미에서이다.
몸의 근육보다는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 우리는 체력을 키우기 위하여 근육을 키우고 운동을 한다. 그것은 몸의 근육을 키워 줄 뿐이다. 그 만큼 강화해야 하는 것은 마음의 근육이다. 자아 중심을 잃지 않고 당당해 지기 위해서는 이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말이다. 이것은 운동을 통해 얻어 지는 근육이 아니다. 마음의 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몸의 근육은 무거운 바벨을 들어야 생기지만 마음의 근육은 내려 놓아야 생긴다. 서서히 내려 놓을 준비와 내려놓는 작업을 일찍 시작해야 한다.
먼저 다가 가야 한다. 휴대 전화의 용도는 거는 거다. 받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이 경과 하면 휴대 전화는 스스로 울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휴대 전화의 디폴트는 거는 용도로 다시 세팅이 되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지 않으면, 내가 먼저 다가 가지 않으면, 가까이 갈 수가 없다.
행여 나를 찾는 전화가 있고, 그것도 “그냥 생각이 나서 걸어 봤어” 라는 지인의 전화를 받는다면 당신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마음은 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리는 ‘마음이 간다’ 라고 표현한다. 그것도 먼저 가야 하는 것이다.
‘박사’보다 한 수 위는 ‘밥 사’이다. 나의 지식을 뽐내며 남을 가르치려 하는 박사보다, 밥을 사는 ‘밥사’ 가 으뜸이라는 말이다. 내가 베풀 지 않으면 안 된다. 베푸는 것 중에 으뜸은 밥을 사는 것이다. 술보다 밥이다. 먼저 베풀어야 베풂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박사처럼 아는 체 하는 것이 아니라, 밥을 사야 관계를 맺고 계속 할 수 있다.
내가 속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과의 모임이 아닌 나를 전혀 모를 수 있는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공유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집은 나의 쉴 곳도, 나의 노는 공간도 아니다. 집 밖에 스스로 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그래도 익숙한 공간에서 잘 쉬기 위해서는 가족과의 벽을 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을 하고 다가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뒷방 늙은이에 삼식도 못 챙겨 먹는 ‘영식이’가 되어 버린다.
이것만은 꼭 전해주고 싶다.
사람이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다워진다. 그리고 슬픔은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울 때 더 진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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