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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전상서 ⑭> 우리는 모두 전 (前)씨가 된다, 퇴직 이후의 정체성과 이름의 유통기한에 관하여

by 괜찮은 꼰대 2025.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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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 모두는 전 (前) 씨가 된다. 우리는 '팀장님’, ‘부장님’, ‘사장님’ 증 이름보다 직급이나 호칭으로 불리는 것에 익숙하다. 이 호칭은 단순한 직무 구분을 넘어, 어떤 사람의 존재 가치와 위계를 드러낸다. 문제는, 이 호칭이 사라지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잃은 듯한 공허함을 느낀다는 점이다. 퇴직 후에도 “전무님” 소리를 그리워하고, 심지어 골프 모임에서도 “상무님”으로 불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 정체성을 증명하게 된 걸까? 

 

우리 모두는 전 (前) 씨가 된다

 

 

철수야 라고 부른다면?

 

45세인이 철수 부장 A물산 기획팀의 책임자이다. 어느 날 신입 사원인홍 길동 주임이 그에게‘철수’라고 불렀다고 가정해 보자.야자 타임도 아닌데 말이다.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아마도 홍주임은 사람 취급을 못 받을 것이고 제대로 가정교육을 못 받은 호래자식으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 식으로는 이렇게 이야기 해야 한다. (존경하는) ‘이 철수 부장님또는이 부장님이 올바른 호칭의 방법이다. , (, family name) 또는 성명인 이철수+  (부장) + (존중의 칭호)를 결합하여 불러야 한다. 한국에서는 성과 이름을 다 기억하지 않아도 그리 불편은 없다. 성만 기억하고 뒤에다 직급을 붙이면 된다. 유독 한국, 일본, 중국 3개국은 이렇게 상대방을 부른다.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냥 이름이나 성을 부르지는 않는다. 성명을 표기할 때, 동서양에는 차이가 있다. 동양권에서는 성이 먼저 오고, 이름이 뒤따른다. 반면 영미권은 첫 이름 (first name)과 중간 이름 (middle name) (Family name) 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의 45대 대통령인 트럼프 대통령의 성명은 Donald John Trump이다.  성명의 어순이 우리와 정 반대이다. 그리고 그들은 친숙한 경우 첫 이름을 부른다. 우리도 친구 사이에 이름만 부르 듯이. “철수야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 별도의 허락이 없으면, Mr. Trump라고 하고, 친해지면 첫 이름을 부른다. 나이와는 그리 관련이 없다. 어떤 이는 첫 만남에도 첫 이름 즉, ‘도날드로 불러달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벽을 허물기 위해서이다. 한편 그들은 여성이 출가를 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 김영희가 이 철수와 결혼하면, 이영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자식은 부친의 성을 따르나, 부인은 본인의 성을 끝까지 사용한다. 우리의 평등 의식이 더 높아도 보인다.

 

서양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별도의 칭호가 있다.  대통령에게는 우리의대통령 각하에 해당되는 Mr. President라고라고 하고, 판사에게 Your Honor, 국왕에게 Your Majesty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정은 과의 회담 시에 Chairman Kim이라고 한 것은 어느 정도 예우를 해준 거다. 하지만 외교의 만남을 떠나, 절친은 아닌 듯하다. 절친이라면, 사석에서는정은이라고 했을 테니까.

 

일본의 경우는 영미권 보다 더 복잡하다. 친구나 동년배들에게 편하게 쓰는 말, 존경어, 겸양어, 여성이 사용하는 언어 등 구분이 많다. 한국 사람들에게 일어 입문 과정은 쉽다. 어순이 동일하고 발음도 얼추 비슷하다.  그러나 존경어 겸양어에 들어가서는 손을 들어 버리기 쉽다. 그들이 상사를 칭하는 것은 우리와 유사하다. 이 철수 부장님을 이 부쵸우 사마 (李部長 : さま)라고 부른다. 우리와 다른 것은 성+ (さん)로도 많이 부른다는 것이다. 우리로 보면이씨!’ 에 해당하는 이상 ( さん)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건설 현장에서 소장이 일용잡부에게 이 씨 하고 부른다. 일상에서 사용하면 큰 일이 날 수도 있다.

 

회사 내 상사를 호칭하는 것은 동서양이 차이가 난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떠한 문화가 담겨있을 수도 있다. 동양권에서는 성이 앞에 오니 즉 가문을 중요시했을 수도 있다. 우리식으로 하면 전주 이씨가 중요했을 수도 있겠다. 또한 회사 내 호칭에 성 ()과 직급이 결합되는 걸 보면, 직급에 대한 존중 및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나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상무님은 영원한 상무님?

 

우리는 현직에서 물러나신 분들을 칭할 때, 김 상무님, 박 이사님, 김 교수님, 이 의원님 이라고 부른다. 현직이 아니더라도 그분의 퇴직 직전 호칭을 부른다. 그 분 또한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일면 즐긴다. 그렀게 부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다른 호칭을 찾을 수도 없다. 전직 김 철수 상무 님을 그냥 김철수 씨’라고 하면 예의가 아닌 듯하다.그냥 예전의 직급으로 부르고, 부르는 게 편하고, 그러면 나쁘지 않다. 그 분들도 싫어하지 않는다. 퇴직 임원들이 과거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과 만났을 때, 반드시 물어보는 것이 하나 있다. “요즘 어떻게 돌아가나?” 이 때에는 반드시 얼굴을 찡그리고 엉망인 듯 이야기하여야 한다. 예전과는 달리 현재 그 자리를 이어받은 후임자 누구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여야 한다. 퇴직하신 그 분의 존재감과 빈자리를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퇴직 임원은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사실 회사는 그분의 부재에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고 그래야 조직이고 회사인 것이다. 어느 한 개인의 부재로 회사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 사람을 퇴직 시킨 것은 잘못된 행위가 되어야 한다. 

 

 

세상은 그대로야~

영화 더 컴퍼니 맨 (The Company Man)의 한 장면을 보자. 미국 대기업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실직자들의 이야기다. 샐러리맨이라는 것이 "임금 노예"라는 사실을 굳게 각인 시키는 영화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자신을 해고한 회사를 향해 돌을 던지며, 울부짖는 한 직원의 말이다. 그 직원은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뭐가 가장 끔찍한 지 알아? 이 세상은 그대로 라는 거야. 내 인생은 끝나버렸는데. 신경 쓰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본인이 수십년 동안 몸을 바친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지만, 회사는 너무나도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아프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이러한 외롭고 버림받은 듯한 개인과는 달리 언제나 끈끈한 결집력을 자랑하는 사조직도 있다. 저승에 가서도 모임을 가질 3부류가 그들이다. “해병 전우회, 고대 동문회, 그리고 호남 향우회”라고 한다. 필자는 ROTC 모임도 하나 추가 하고 싶다. 사람들은 한 편으로 그들이 부럽고 그들의 배타적인 성격에 비난을 퍼 붓는다.그들은 왜 그리도 결속이 강하고 잘 모일 수 있는 것일까? 필자는 거꾸로 뒤집어 이렇게 이야기한다.그들은 반드시 모여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어디 어디 출신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그들만의 폐쇄적인 리그에서 그러하니 말이다.

  

세상을 향해 열린 시선은 분명 아니다. 출신성분을 기반으로 우리가 남이가’로 발전하고, 뭉치면 우리는 다르다’라는 이야기를 해야 할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파벌이나 그들만의 골목 리그 (메이저 리그나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는 아니다)를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닐까? 편가르기를 통해 위안을 얻고, 강력한 배타심과 결속력이라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병대 모자와 군복은 벗어야 하고, 잘 먹지도 않는 막걸리 대신에 소주나 맥주 잔을 들어야 한다. 그들은 소주잔을 들고도 막걸리 찬가를 부른다. 주민 등록증의 본적 난을 없애야 할 수도 있다. 그래야 비로소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이루어 지지 않을지?

 

제 3의 공간

 

한 사회학자는 현대인에게 통상 지내는 사람과 공간이 아닌 제3의 사람들로 구성된 제3의 공간을 만들라고 한다.  그것이야말로 본인의 견고한 프레임을 깰 수가 있고, 상자를 벗어난 사고를 키우고, 자신을 루틴 속에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렀다. 그러하지 않으면 미로를 헤매는 실험실 속 생쥐나 무한 괘도 쳇바퀴를 돌고 있는 다람쥐의 삶이 될 가능성이 높다.

 

존경하는 지인 중에 이런 분이 있다. 그 분은 고려대 출신에,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일상은 호기심 천국이고 무한 도전인 듯하다.  그 분은 미술 동호회 전시회 및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하는 노익장을 발휘하고 있다. 요사이는 요리를 배우고 계신다고 한다. 언젠가 그 분이 독서 토론회에 참석하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젊은 세대와의 대화를 위해 30대가 주축인 한 독서 토론회 참가 후기였다. 일단 본인은 기존 회원들과 족히 30살의 나이 차가 났다고 한다. 즉 아버지뻘 되었다고 한다.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상당히 스마트 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 역시 본인에게 삶의 지혜와 숙성된 연륜을 배울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주파수

 

서로 호기심을 갖고 만나면 같은 존재가 되고, 존재와 존재가 만나면 상호 마음의 진동이 느껴질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의 주파수가 맞추어 진다. 상호 교류가 가능하고 같은 흐름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우리는 치수도 맞지도 않은 무거운 과거의 유니폼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과거의 동굴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무거운 꺼풀은 벗어 던져야 한다. 계급장은 떼어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인으로서 자연인을 조우할 수 있다.

 

우리는 조직 속 구성원인 와 소셜 라이프 속 의 존재가 혼재된 상태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조직 속으로 숨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 임에도 나이가 많음을 내세우거나, 직급이 높음을 이유로너 몇 살 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또는 범죄와의 전쟁의 최민식처럼느그 서장이랑 인마,어저께도 같이 밥 묵고 사우나도 가고 마, 임마인마 다 했어 인마”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거운 과거의 유니폼은 벗어던져야 하고 과거의 동굴에서 탈출하여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밝혀주는 어르신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바로 시니어 꼰대들이 그러해야 한다.

 

  

계급장 떼고 유니폼 벗어 던지고, 현재 나의 모습으로

 

이런 경험이 있다. 이웃이었던 한 미국인 가족과의 사적인 만남이었다. 그가 건넸던 명함이 인상적이었다. 가족 명함이었다. 본인, 부인, 자식의 이름과 연락처와 자택 주소가 나란히 새겨진 명함이었다. 묵직한 감동을 받았다. 회사 명함을 건네는 내 손이 부끄러웠다.

 

우리도 이러한 개인 명함을 파야 한다. 거기에는 회사 이름도, 직함도 없어야 한다. 누가 아내이고, 누가 자식이고, 본인은 그녀의 남편이고, 그들의 아버지임을 새겨 넣어야 한다. 회사 명함 속 나라는 존재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새겨 넣어야 한다.  

 

은퇴하신 꼰대 상사 님들의 성은 모두 전씨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의 계급장은 떼어 버리고, 현재 나의 모습으로 현재의 사람들과 조우해야 한다. 영원한 이 철수 부장이 아닌 이 철수 부장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교수님, 상무님, 대표님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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