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적 의미로 문제란 "골치 아픈 상황"이다. 그렇다면 아주 아픈 질문 하나 던져보자. 골치가 아픈 건 누구인가? 바로 ‘나’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내가 불편하다’는 것이 핵심인데, 우리는 언제나 이 불편함을 외부에 투사한다.
“네가 문제없다고? 그게 제일 큰 문제야”
“너 진짜 문제 있어?”
“아니, 그 녀석이 문제야.”
“내가 뭐 어쨌다고?”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고, 문제를 자기 탓이라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늘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마치 반사 신경처럼 이렇게 말한다. "쟤가 문제야." 혹은 "그 상황이 말이 안 되지."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딘가엔 '진짜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듯이 끊임없이 주변을 훑는다. 근데 말이다, 정작 그 문제의 근원은 늘 눈앞에 있다.
"세상 다 미쳐 돌아간다"는 말, 사실은 나 빼고 다 맞는다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로 문제란 "골치 아픈 상황"이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던져보자. 골치가 아픈 건 누구인가? 바로 ‘나’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내가 불편하다’는 것이 핵심인데, 우리는 언제나 이 불편함을 외부에 투사한다.
“상사가 이상해.”
“정치가 문제야.”
“세상이 썩었어.”
“지구가 나한테만 엄격해.”
그럴싸하다. 그럴싸하지만, 이상하다. 왜 모든 문제의 중심에 내가 있는데, 나는 빠져 있는가?
원인 따위 관심 없고, 결과만 물어뜯는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려면 첫째, 시작을 알아야 한다. 결과에 집착하면 원인을 놓친다. 시험 망친 학생이 “아 진짜 시험지 퀄리티 너무 별로였어”라고 외칠 때, 그가 문제의 원인을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채로 탓만 하고 있는 것이다. 자꾸만 '누가 이런 결과를 만들었냐'는 질문은 결국 ‘누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는가’로 이어진다. 근데 정작 그 마음, 스스로가 불편하게 만든 경우가 태반이다. 행동은 타인이 했지만, 해석은 나의 몫이다.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은 건 당연하다. 문제는 그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나’에게 있다.
내면 들여다보는 게 무서워서 평생 바깥만 기웃거린다
진짜 문제는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자세'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내면을 마주하는 걸 무서워한다. 어두운 동굴 같다. 불 꺼진 방 안에 들어가서 뭔가를 찾아야 하는데, 거기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무서우니까 안 들어간다. 그 대신 밖을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상황, 저 제도, 심지어는 날씨까지 탓한다. 세상이 문제라며.
그러나 그 동굴 안에는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정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뿐이다. 그걸 모르고 헤매다 보면, 문제는 점점 커지고,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진다.
통찰은 멋있어 보이는데, 성찰은 아파서 싫다?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는 세 가지 ‘찰(察)’이 필요하다.
- 관찰: 외부를 바라본다.
- 통찰: 내부를 꿰뚫는다.
- 성찰: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많은 사람이 관찰에는 능하다. 남 잘못 보는 건 전문가 수준이다. 통찰도 간간이 한다. ‘저 사람 왜 저럴까?’ 하고 머리를 굴리곤 한다. 그런데 성찰은 안 한다. 왜? 그건 아프고, 불편하고, 솔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민낯을 마주하는 건 누구에게나 고역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에 도달하려면 성찰은 필수다. 성찰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결국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문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결국 문제는 ‘문제’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문제를 외부 탓으로만 돌리는 그 자세, 내가 빠져나오지 못한 감정의 습관, 나를 보지 않고 남을 보기 바쁜 태도다.
이제는 거울을 볼 때다. 그 속에 문제의 시작이 있고, 문제의 해결도 있다. 우리는 모두 약간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자신이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이다. 아, 고집도 문제다. 그래, 그럼 또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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