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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전상서 ①> 프롤로그,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그렇게 나쁜 꼰대는 아냐!!" "그래도 괜찮은 꼰대를 지향하자"

by 괜찮은 꼰대 202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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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을 일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거죠?

 

이 글을 쓰게 된 단초는 한 굴지 기업 인재 개발팀 (HRD) 팀장의 한 마디였다. “매니저들에게 밀레니얼 세대와의 소통”이 중요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런데요 (약간 정색을 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왜 그들을 일방적으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거죠? 그들도 (우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요즈음 시류와는 상당히 반동적인 언사임에 분명했다. 그것도 HRD팀장이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충분히 신선했다. 왜 기성 세대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로)를 포함한 조직의 상사들은 (일찍 입사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존재가 부끄럽고, 가치관이나 사고가 낙후된 것으로 치부되어야 하는가? 일방적으로 그들을 헤아려야 하는가? 일방적으로 밀레니엄 세대 또는 신세대들을 이해하기 위해, 왜 이렇게 난리 법석을 벌여야 하는가? 그래봤자, 그들은 그들의 상사들을 "꼰대"라는 상당히 부정적인 2음절어로 치부하고 평가절하할 가능성이 많은데 말이다. 즉, 꼰대라는 단어가 연상되었다.

 

 

 

 

 

미래의 주역, 당연하다. 부정하지 못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리이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짝사랑 또는 외사랑을 하여야 하는가? 에 대해서는 많은 성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해야 현재 조직의 상사는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다. 조직에서 사람, 구성원의, 만남은 부부의 연을 맺은 남. 녀, 그리고 가족의 만남이 아니다. 기한이 정해진 만남이다. 싫어도 인생에 있어서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긴 시간 동안 회사라는 울타리에서 그들과 매일 얼굴을 맞대고 비비며 지내야 하는 숙명 속에서 서로 이해하자는 당연한 결론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같이 공존하고, 같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같이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적인 이유 이외에도 기성세대가 갖고 있는 지혜의 대물림의 차원에서도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용한 외침 또는 나비의 날개짓 이었지만, 커다란 외침으로 들렸다.

 

모 그릅에서는 멘토링 (선배 사원에 의한 , 주로 임원들이 신입 사원들을 위한) 제도를 떠나, 이제는 역멘토링 제도가 시행되기도 한다. 즉, 신입, 후배 사원에게 무언가를 배우라는 말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라는 제도 일 것이다. 이 전에는 시행해 본 적이 없는, 이 제도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하는 어느 굴지 대기업 인재개발팀의 고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두 가지, 즉 멘토링 및 역멘토링이 양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 흐르는 근저의 핵심 단어는 서로, 같이, 상호, 교류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I'm not Such a Bad guy)"

 

선배로서, 상사로서, 기성 세대 및 나름 기득권 층으로 분류되는 계층들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그들은 아마도 “나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I'm not Such a Bad guy)"라고 외쳐대고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bad와 such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우선 bad는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꼰대는 아니라는 것이고". 그리고 그 정도의 such라는 것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정도의 개꼰대는 아니다" 라는 일부 긍정 이자, 일부 부정이자, 아니 전부 부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조각 자존감의 발로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꼰대라는 단어와 존재에 대해, 꼰대의 변호인 입장에서, 동시에 꼰대를 위조하는 냉철한 검사, 즉 외부 관찰자의 입장에서, 해부하고 뜯어보고 싶어졌다. 이를 위해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향후 계속 글을 써보려고 한다.

 

글을 시작하며

 

나는 베이비붐 세대이다. 나름 무난한 삶을 살아왔고 어느 정도는 행운아였다. 그 근거로 홍역을 안 했고,사랑니가 (아직) 안 났고, 재수를 안 했고,군대를 가지 못했다. 30세에 찾아온 홍역 때문에 행운의 숫자는 하나 줄어들었지만,최소한 2개는 평생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종합 상사와 은행에서 30년 가까이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의 신분을 유지하였으니 나름 평균 이상의 삶이었다고 자평한다. 그 무대의 막은 내렸고, 커튼 콜은 없었다. 이제는 기업 교육 현장에서 강사의 삶을 보내고 있다. 떨림과 설렘을 즐기고 있고,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후배들과 같이 호흡하고 소통할 수 있어서 좋다. 역량 강화를 통한 고객의 목표 달성 및 성장에 일조한다는 보람도 적지 않다. 아마도 현재의 나는, 이전의 나에게 수고 많았어라는 따뜻한 말을 주저 없이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직장 생활을 마치면 은퇴라고 말하고, 인생 2막 또는 제2의 인생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에게 아직 그 2막은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은 다가올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1.5막 정도로 생각된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화두를 자주 반추한다. “10년 후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여기에서의 10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0년은 아마도 온전한 정신과 신체로 생각하고 행동할 마지막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잘 익은 포도주 한 병을 만들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이외에, 꼭 해야만 할 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글 쓰기였다.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주제로 호흡이 긴 글을 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글쓰기의 화두와 단초가 된 것은 한 대기업 인재 개발팀장의 한 마디였다.

 

약간의 정색을 하면서, “맞지요. 그런데요,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왜 일방적으로 우리가 그들을 이해해야 하는 거죠? 그들도 우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여기서 우리라 하면 기성 세대이고, ‘그들이라 하면 요즘 세간의 주목을 다 받고 있는 소위 밀레니얼 세대’를 지칭한다. “매니저들 대상으로 밀레니얼 세대와의 소통 관련 교육이 중요하지 않을까요?"라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현 시류와는 상당히 반동적인 언사임에 분명했다. 그것도 인재개발팀을 이끌고 있는 팀장으로서. 그러나 충분히 유쾌, 상쾌, 통쾌했다. 평소 내가 생각해 왔던 것을 통렬하게 대변하는 말이었다. 그것도 일방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요즘은 밀레니얼 세대’, 그들을 모르면 시대에 뒤처지는 듯, 경쟁적으로 책과 방송의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를 다룬 한 서적은 공전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미래의 주역이며 잠재력이 큰 소비자인 그들에 대한 연구 및 배움의 열기는 뜨겁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대 연대기의 멈추지 않는 시간 흐름 속에서, 후세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갈 세대, 밀려날 세대

반면, 기성세대들은 억울하다. 홀대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밀레니얼 세대들이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꼰대이다. ‘꼰대’라고꼰대’ 라고 불리며 마치 마녀사냥 당하 듯 거칠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미지는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존재이고, 낙후된 가치관과 사고의 소지자인 갈 세대 또는 밀레니얼 세대대비 밀려날 세대또는 밀려난 세대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어쩌면 매도 수준을 넘어, 경멸과 혐오의 존재로 희화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 통념과 시대상에 심한 태클을 걸고 싶어졌다. 기성세대, 기득권 세대, 꼰대라고 일컬어지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 시대는 그들의 이야기를 청하지도 귀 기울여 주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상황은 마치 법정에서 피고의 죄상을 이야기하는 젊은 검사 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지고 있는 듯하다. 노회한 변호사나 피고의 변론 기회조차 박탈하고 있다. 공정한 판사라면 항변과 변호의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해부하고 뜯어 보아야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짝사랑이나 외사랑을 바탕으로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상호 작용과 섞임을 통한 이해의 결과가 관계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레니얼 세대나 꼰대 세대가 어떻게 상호 이해하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같이 지내며 공존하고, 같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기성세대를 변호할 의향은 없다. 그렇다고 밀레니얼 세대들을 전적으로 옹호할 생각 또한 없다. 다만 기성세대의 관점과 시각으로 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어떻게 스스로 변화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싶었다. ‘인간은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 당하는 것에 저항한다는 말이 있다. 자발적 변화의 출발점은 자기 성찰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 만을 바라보는 것은 이루고자 하는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 변화하는 흉내만 내는 것일 수 있다. 관점을 나로 옮기고, 나를 먼저 직시하고, 필요하다면 처절한 고해성사를 하고 난 후, 남을 바라볼 때 변화의 시작은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선 나는 그렇게 나쁜 꼰대는 아니다라는 부분 부정 및 부분 긍정의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 꼰대 맞아’라고 인정하고, 그 후에 괜찮은 꼰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꼰대가 쓴, 괜찮은 꼰대에 관한, 꼰대적 고찰'

원하든 원하지 안튼, 우리는 모두 누구의 꼰대이다. 꼰대는 누구나 될 수 있고, 어느 시대에나 있고, 계속 나올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세대 교체라는 연대기적 수레바퀴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순리에 따르며 그 속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제 대부분 베이비 붐 세대들은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빈 자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정체불명의 세대라고 불렸던 70년대생인 X세대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2019년 기준 1970년 생이 한국 나이로 50이 되었으니 말이다. 신세대 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쓰인 자유로운 세대인 그들이, 이제 우리 사회의 핵심 꼰대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누구나 연탄 갈기처럼 서로에게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하얀 연탄재로 사라진다. 바통을 넘겨주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숙명을 지니고 있고, 그래야 한다. 아쉬워하고, 버텨 보아도 그럴 수는 없다.  다만 세대 연대기의 흐름 속에서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충분히 물려주고 아쉬움 없이 떠나야 한다. 그러하다면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스스로 자문해 보면 지금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이 글의 부제는 꼰대가 쓴, 괜찮은 꼰대에 관한, 꼰대적 고찰이다. 즉 괜찮은 꼰대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좌충우돌했으며, 심한 슬럼프에도 빠졌었다. 모든 것을 모두 게워내 텅 빈, 속 쓰라림에 뒹굴기도 하였다. 세상을 향해 말을 건다는 두려움에 숨어 버리기도 하였다. 꾸역꾸역 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로 다가온다.  그래도 ‘10년 후 미래의 나’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싶다. “참 열심히 마지막 불꽃을 태웠네 그려. 수고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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