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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전상서 ④> 꼰대 아버님 전상서

by 괜찮은 꼰대 2025.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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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권상실의 시대이다. 멋진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리의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지금 눈에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꼰대'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것도 고개를 푹 숙이고 뒤로 숨는 그런 불쌍한 꼰대의 모습이다. 

 

 

 

1. 아는? 묵자, 자자

 

과거 한국의 아버지들의 권위와 위치를 상징하는 세 마디의 말이 있었다. 경상도 사나이의 기개를 과시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집에 들어오면 아는?” “묵자” “자자 라는 3마디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아이들의 안부, 먹는 것, 그리고 자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그들은 가능하면 과묵하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또한 부엌에 드나들면 무엇이 떨어진다고 집안일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받았었다.가장이 수저를 들지 않으면 식사를 시작할 수 없었고, 가장이 먼저 손대지 않은 반찬은 먹을 수도 없었다. 남자들끼리 밥상에 앉았고, 여인네들은 별도의 상이나, 하물며 부엌에서 식사를 했다. 그래서 부엌데기란 말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머니들이 짜장면을 싫어한 이유도, ‘어두 육미’라는 말의 기원도, 모두 이 기구한 한국 여인들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이다.

 

가부장인 남성은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보금자리를 제공해야 할 의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가장의 말씀 한 마디는 왕의 명령이었고, 행여 ‘말대답’은 도전을 의미했었다. 또한 남자 중심의 호주 제도 또한 이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장자 우선의 상속제도, 남아 선호 사상의 뿌리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렇도록 한국의 아버지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무한의 권한과 권위를 부여받았었다.하지만 지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호랑이도 금연하는 시대인 것이

 

한국남자의 모습과 위상을 최태섭 작가는 그의 책 [한국 남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남자들의 자기 연민은 존재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향수로 나아갔다. 언젠가 남자로서의 권위를 마음껏 누리고 여자들의 존경과 수발을 받고 살 수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단 한번도 한국 남자들은 온전한 가부장이었던 적이 없다.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폭군이었거나, 돈을 벌기 위해 멀리 떠난 가장 이었거나, 죽어서 없는 존재였다. 아버지는 없거나 없는 게 더 나은 것이었지, 존경 받고 사랑받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었다. 한국의 남자들은 오랫동안 그럴 필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빠의 청춘’ 류의 가부장 신파 역시 일종의 자기 미화에 더 가까웠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로 먹여 살릴 능력이 되었던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희생은 자기 연민을 위한 소주잔에 따라 마셨기 때문이다”

 

 

2. 내일 또 놀러와

 

 

현재의 상황은 많이도 달라졌다. 가부장 또는 가장이란 단어는 잊힌 지 오래이다. 가장인 아버지 역할에 대한 가치가 입에 풀칠하던 시대와는 상이하다. 아버지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 역시 감소하였다.언제부터인가 아빠라는 축어가 대체하고 있다. 어느 피로 회복제 광고의 카피인 내일 또 놀러 와"는 현재 아버지의 위상을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가슴이 찡하다 하기보다는 애처롭고 잊힌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계를 책임지는 돈 벌어 오는 기계외에는 부여받은 역할이 없다. 힘들게 돈 벌어 오는 거라고, 웅변하듯이 이 아버지 힘주어 가족들에게 외쳐봐도씨알도 안 먹히는 반동의 언사가 되어 버린다. 되돌아 오는 메아리 소리는 “그래서?”이다.가부장제 하에서 ‘강요된 순종의 미덕은 작용하지 않는다.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무시당한다.가장이라는 존재는 기껏해야 경제적 부양자라는 역할 이외에는 무장해제 되었고 거세당했다.    

 

더 이상 의사결정권자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하물며 속옷 및 양복 구매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의사 결정권자인 부인의 몫으로 넘어간 지 오래이다. 병원에 가더라도 의사와의 면담 시, 부인이 의무적으로 동참하며 대화를 주도한다.

 

그놈의 자동이체라는 문명의 이기는 만 원짜리 지폐로 두툼한 월급봉투를 건네주던 한국 아버지의 위상을 처참하게 파괴하였다. 거하게 술 한잔 걸치고, 전기 통닭과  ‘새소년‘새 소년’, ‘어깨동무’어깨 동무’ 책을 굳이 잠자는 아이들을 깨워 건네주는 폼 나는 기둥 같은 존재는 사라졌다. 본인의 급여계좌임에도 불구하고 손도 못 대고 자동적으로 월급의 주인까지 이체된다. 회사에서는 임금 노예이고, 집에서는 급여를 전액 강제 차압 당하고 용돈 타서 쓰는 용돈 노예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신파 적 향수를 불러일으켜도,아 옛날이여라는 유행가 가사만이 생각날 뿐이다.   

 

3. 부성애는 존재하는가?

 

부성애는 존재하는가? 부성애 상실의 시대이다. 모성애의 위력은 강해져만 가는데, 부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어렵다. 아버지는 어깨가 넓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였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들에게 다가가더라도 그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짝사랑, 외사랑을 넘어 고립된 섬에 독거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들은 새가 되어 버렸다. 기러기 아빠’라는 단어를 들지 않아도 말이다.  서양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문화 중에 으뜸으로 꼽는 것이, 자식의 교육을 위해 가족이 헤어져 산다는 것이다. ‘자기희생의자기 희생의 극치라고 변론하지만,그들의 눈으로 보면 이건 희생할 수 없는 가치를 포기한 것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지인의 실제 이야기이다.주재원이었던 남자는 임기 종료 후 귀국한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미국에 눌러앉는다.자식 교육이 이유였다. 한국으로 일 년에 한 번씩은 귀국하던 가족은, 비행기 삯을 이유로 그에게 넘어오라고 한다. 하루 이틀 동안은 애틋한 정으로 푸근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며칠 후 겉도는 본인의 모습에 놀랐다고 했다.  가족들의 대화에 동참이 불가능했고,이방인 내지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양 느껴진다고 한다. 아버지의 존재는 학비와 생활비를 송금하는 것 이외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가족 일원으로서의 존재가 박탈된 것이다.

 

예전에는 훈육과 혼내는 역할은 아버지의 몫이었고, 푸근하게 안아주고 달래 주는 역할은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엄마에게 혼난 아이들을 감싸 안아 주어야 하는 역할이 아버지의 역할로 치환되었다.그 역할조차 쉽지는 않다. 누군가를 안아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숨을 곳이 없으니, 본인의 방에 숨어 버리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4. 멋진 아버지의 모습은 존재하는가?

 

멋진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의 모습은 배 나오고 술 냄새와 니코틴 냄새에 찌든, ‘귀차니즘에 사로잡힌, 그리고 불만에 가득 찬 모습이 아니던가? 그러하니 그들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한국 아버지의 모습은 성희롱, 성폭행, 언어 폭력, 직장 내 괴롭힘, 갑질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짓이 바로 한국 남자, 한국 아버지들에 의해 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아버지들에게 쉴 공간은 없다. 가족 들의 노는 공간밖에는 없다. 혼자나 둘이 놀다가 새로운 멤버가 저녁때 오면 같이 놀자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아버지들은 쉬고 싶다. 소파는 앉아 있는 공간이 아닌, 누워서 스포츠 중계나 뉴스를 시청하는 편안한 공간이어야 한다. 러닝 셔츠 바람에 헐렁한 반바지를 걸치고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간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가장의 권리를 주장해 보지만 가족 구성원은 더 이상 권위에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다. 시도해보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반동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다. 커다란 개에게 덤벼 깨갱 하며 물러 서는 하룻강아지의 모습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변화된 존재감에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즐긴다. 아니면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무기력한 모습으로 동정을 구한다. 식민지 시대, 군부 독재 시대 항거 하지 못하는 초라한 시민의 모습이 오버랩된다.회사라는 조직에서 꼰대 짓의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그들의 가정 내의 모습은 무기력하다. 반려견을 보는 듯하다. 아니면 거세당한지도 모르며 바운스를 해대는 강아지의 모습을 보는 듯도 하다.

 

책임은 고의적으로 회피한다. 특히 자식들의 교육 관련 이슈는 그러하다. SKY 캐슬로 대변되는 우리 교육 현실에 위험을 짊어지고 굳이 개입할 필요도 없다. 사실 개입하려고 해도, 끼어들 빈틈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관이나 적당한 무관심이 그들이 취해야 할 최적의 포지셔닝이다. 못난이 삼 형제 인형처럼 회피와 방기를 위해 눈 가리고, 귀 닫고, 입을 닫아 버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그것이 더 편할 수도 있다.  

 

많이 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러하지 못하다. 배우자에게 신문도 안 보고 책도 안 읽고 정치 사안에는 문외한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기도 이제는 쉽지 않다.그들 또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뉴스가 유일한 정보 소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구 골통의 표상이거나 싹수없는 진보이거나 강남좌파의 탈을 쓴 빈 껍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우월하다는 의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전통적인 남자의 세계관에서 살아가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동물적 본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남자는 늘 바라지만 언제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여자는 언제나 할 수 있지만 늘 바라지는 않는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언제나의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고무줄 놀이하는 여자 아이들의 고무줄을 자르거나 아이스 케키하며 치마를 들추고 달아나는 악동의 모습은 허용되지 않는다. ‘역차별을 이유로 군 가산 점을 주장하는 것을 떠나, 교사 임용의 경우는 여초 현상 타파하기 위한 역 혜택을 받고 있다.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변죽만 울리고 있지 않은가? 젠더 논쟁은 항상 남자가 지게 되어 있다. 잃어 버린 고지를 탈환하거나 회복하는 것은 어렵다.

 

 

5. 우월의식인가? 열등의식인가?

 

우월 의식은 열등의식에서 나온다. 예전에 광복절 특집으로 한국과 일본 석학들이 현해탄을 건너며 토론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다. 앙숙을 떠나 적으로 인식하는 이유에 대한 토론에서 상호 우월주의가 아닌, 상호 열등 주의가 그 원인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었다. 그렇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라는 존재는 우월하지 않다. 과거의 권위나 우월성을 되찾기 위해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열등함을 이야기 하는 작은 몸짓에 불과하다. 권리를 주장하려면 부수적, 부차적인 것을 제거하고 동일한 출발선에서 이야기하여야 한다. 10미터 앞에서 출발하려고 억지를 부려봐야 실격된다.   

 

부권 회복 운동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회복 운동을 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존중과 존경받는 어르신이 아닌, 동등한 책임과 권리를 지닌 구성원 자격의 요건을 맞추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하지 않으면, 졸혼을 떠나 아버지 해촉장을 받을 수도 있다. 대화 소통해야 한다. 스스로 우월의식을 벗어 버리고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가족과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어야 하고, 그늘이 되어 주어야 하고, 쉴 수 있는 그루터기가 되어 주어야 한다. 정작 갖고 있는 것은 넓은 어깨 밖에는 없다. 안아 주어야 한다.

 

시간의 흐름에는 방법이 없다. 유일한 자기변호 수단이었던 생계 해결자역할도 50 중반이면 사라진다. 삼식을 제공받지 못하는 영식이가 되고, 애물 단지가 되어 버린다. 삼식을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폼 나는 삼식이가 되어야 한다. 아니면 종신 보장되는 아빠 자격 종신 보험에라도 가입해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메갈리아 로고처럼 엄지와 검지로 표시되는 요만한 놈또는 모 같지도 않은 놈이 되어 버린다. 바로 치료 불능 꼰대 아버지가 되어버린다.

 

 

#꼰대전상서 #꼰대아버지 #부권회복운동 #당신은꼰대아버지인가 #내일또놀러와 #부권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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