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뚜벅이’고 ‘뚜벅이’가 좋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며 세상을 보는 재미도 솔솔 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버스나 전철 등 대중교통수단을 주로 이용한다. 그러나 무척이나 힘이 든다. 대중교통에서 무법자들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며, 그들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진정 삶이 고해 (苦海)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의과대학에는 새로운 학과가 필요하다. 그 이름은 '불감증 치료학과'이다.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는 불감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학과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긴급하게 말이다.
1. 버스 or 전철
차를 갖고 출퇴근 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교통 체증과 주차 문제 등 머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으며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늦은 밤 택시를 타기 위해서는 애걸복걸해야 한다. 또한 기사 분과 1:1의 좁은 공간이 주는 스트레스 또한 견디기가 쉽지 않다. 오지랖의 희생양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기도 하다.
따라서 전철과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 그 중에서도 버스를 선호한다. 다소 시간 소요는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단 지상의 풍경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세상을 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허용된 공간이다.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하루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주로 버스 안에서 이다. 왕복 2시간 이상을 허투루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전철 안에서는 집중이 다소 어렵다. 공간이 협소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환승에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버스와 그다지 차이도 크게 나지 않는다. 아주 급하지 않으면 버스를 즐겨 이용한다. 좌석의 배치 또한 버스가 보호받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철 탑승 시 가장 꺼려지는 것은 꼭 겪게 되는 번뇌와 고민의 순간이다. 거창한 것은 절대 아니다.
2. 전철의 무법자
빨리 내릴만한 승객 앞에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최초 선택을 잘해야 한다.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아, 저기에 섰으면 빨리 앉아서 갈 수 있었을 텐데 라는 후회도 엄습한다. 그리고 내리는 승객의 앞에 서있는 사람이, 좌석의 주인이 되는 불문율을 깨는 분들의 모습에 절망하는 것도 싫다. 그들은 도루하는 야구 선수처럼 끼어들어 ‘어이구’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는다. 승리의 함성인가? 또한 전철은 좌석이 마주 보도록 배치가 되어있다. 상대방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대부분 핸드폰을 보거나 눈을 감고 있다. 전철에서는 송구스러움도 있다. 종점 가까이 가야 하는 나의 앞에 위치한 승객을 보면 말이다. 조금의 몸 움직임에 즉각 반응한다. 미안하다.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해본 적도 있다. 앞에 앉아 있는 승객이 하차하는 역을 알 수 있는 안경은 없을까? 또는 자신의 머리 위에 하차할 역이 표시되면 좋지 않을까?
3. 버스의 무법자
상대적으로 버스를 탔을 경우에는 이러한 고민들을 상대적으로 덜하게 된다. 타인의 간섭과 시선을 피할 수 있다. 필자가 즐겨 앉는 좌석은 가장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맨 뒷자리의 양 끝자리이다. 하지만 ‘뚜벅이’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통화 소음’이다. 그들은 거침이 없다.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하물며 누군가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는 젊은이 들도 있다. 거침없이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이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의 군상들이다.
공통적인 특징은 대화의 내용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할아버님들의 대화 소리는 압권이다. 꾸짖듯이, 그리고 자신을 과시하려는 대화의 내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아고라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할머님이나 아주머님들의 특징은 통화 시간이 적어도 20~30분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통화 벨 소리 또한 독특하고, 볼륨은 최대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소프라노의 하이톤이다. 대화의 내용은 그저 그러하다.
그들로 인해 내가 방해를 받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들이 나의 일상을 방해하고 침범할 권리는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나는 소음의 침공을 견뎌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일까? 그들과 비교하여 내가 상대적으로 많이도 예민한 것일까? 수많은 질문을 반복하여 해본다. 예민하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왜냐하면 탑승객들은 반응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들의 방해를 견뎌야 하는 의무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양보하기 어렵다. 상식으로 판단하면 말이다. 상식과 양식이 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계속된다.
4. 엄마와 아이 승객
어느 오후, 여느 날과 같이 버스에 올랐다. 나의 전용 좌석에 앉아 책을 펴 들었다. 아이 둘과 함께 버스에 오른 젊은 아이 엄마. 아이들은 버스에 타자마자 조잘 재잘 떠들어 댔다. 아이 엄마는 아랑곳없이 ‘카톡’ 삼매경에 빠진다. 그런데 성가신 타자 치는 듯한 소리는 20여분 계속되었고 나는 지쳐갔다.
용기를 내서 “제가 왜 그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지요?” 라고 했다. 뒤를 돌아보는 그녀 왈. “예민하시네요? 그냥 하지 말라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했다. “소리가 안 나도록 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리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계속 바빴다. 그녀가 하차하는 15분 후까지.
“내가 진짜 예민한 가 보다”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그들이 ‘불감’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5. 우리는 문화인인가? 혹시 문하인 아닌가요?
저명한 오케스트라 공연 시 울리는 한국 관객들의 핸드폰 소리가 외신에 가십거리로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핸드폰 수신을 차단한 공연장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공연 문화가 휴대전화를 원천적 봉쇄해야 유지 가능할 정도인가?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아주 소수라는 것이다.
부주의하고 둔감한 소수로 인해, 한국 관객들의 수준이 ‘문화인 (文化人)’ 이 아닌 ‘문하인 (文下人)’으로 평가 절하 된다는 것은 억울하다.
영화관에 가도 자주 목격되는 것 또한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이다. 거의 매번 겪는다. 그들의 특징은 전화벨이 울리면 꼭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지금 영화를 보고 있거든? 나중에 전화할게” 또한 영화 상영 후 늦게 입장하는 관객들 또한 꼭 있다. 그들은 양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 들어온다. 스크린에 투영되는 그들의 그림자놀이를 의무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정 좌석에 반드시 앉겠다고 이미 착석한 관객들에게 이동을 강요한다.
우리의 공중 화장실은 더럽다. 휴지통에 휴지가 넘쳐난다. 아직도 변기 옆에 휴지통이 있는 세계 유일의 나라다. 휴지는 변기 속으로 사라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변기 옆의 휴지통에 넣으라는 반 협박 경고문에 따를 수 밖에 없다. 변기가 막힌다는 이유로 휴지통에 버려야 한다.
‘남자가 흘려야 할 것은 눈물 뿐’이라고 쓰여있는 소변기 바닥은 홍수 직전이다. 흘려야 하는 것은 눈물 만은 아닌 듯하다. 세면대 주위는 항상 물로 흥건하다. 손을 씻는 세면대에 그렇게 물이 튈 이유는 별로 없는데도 말이다. 어느 때는 흘린 물을 정리하는 와이퍼 같은 도구가 놓여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 담당 아주머니는 모든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비난과 힐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어느 화장실에는 이런 경고문도 붙어 있다. “소변기 밖으로 소변을 보시는 분께 부탁드립니다. 귀하의 배려 없는 행위로 화장실 안과 밖이 심히 오염되어 여러 사람이 불편과 비위생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좌변기를 이용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소변을 흘리는 분들과 좌변기를 이용하라고 강요하는 분.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다.
그럼 이런 비례, 비상식, 비양식적인 행동들의 조건은 무엇일까?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가 불편함을 느끼면 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성추행의 조건과 동일하다.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이 그렇게 느끼고 불쾌했으면 그러한 것이 되는 것이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저자 정문정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갑질은 멈추라고 하지 않으면 계속된다는 것이다. 모 국회의원의 노룩 패스에 대한 그 의원의 반응을 두고 말이다. 그는 그게 “왜 문제가 되냐? 바쁜 시간에 쓸데 없는 일 가지고” 비례를 하는 당사자들은 그 행동이나 말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고, 타인의 반응에 대해 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들이 부끄러운지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모욕이나 모멸감을 불편을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이들의 특징은 그들보다 높은 직위와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정반대로 변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매장에 13세 이하 어린이의 출입을 금하는 ‘노 키즈 존’을 운영하는 매장을 응원한다. 입장 자격 제한 또는 손님 자격의 제한은 점주의 고유 권한이다. 입장이 가능 하려면 이러이러한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매장의 무법자들이다. 그들이 조용히 식사를 하고자 하는 손님들의 권리를 침해할 권리는 없다. 또한 아이들을 동행한 부모들은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그러나 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귀한 아이들에게 왜 야단을 친다고 되 받아치거나, 아이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화를 낸다. 누구나 무례의 행동을 정당화할 권리는 없고 타인은 감수해야 할 의무도 없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이다. 남을 배려하는 행동이 습관화 된다면 갑질과 꼰대 문화는 자연스럽게 발을 디딜 수가 없다. , 이들에게 소극적,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은 있다. 이들로부터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이들처럼 무심한 척하거나 이어폰을 끼는 것이다. 그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수단은 듣지 않는 것이다. 다른 소음으로 그들의 소리를 덮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비상식적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안 듣고, 안 보고, 말하지 않기 위해, 귀막이와 안대와 마스크가 필요한 것인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비상식적인 행동의 씨앗이 움트는 사회를 만들 뿐이다.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6.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
가까운 일본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의 문화는 겸양을 떠나 부끄러움의 문화라고 한다. 이는 IS등 테러 단체에 자식이 납치된 부모의 기자회견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의 부모는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라고 한다. 일본을 제외한 나라들은 “정부는 자국민의 구조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라고 분노를 쏟아내는 것에 비해서 무언가 다르다. 그들은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사정을 생각한다.
일본인의 특성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메이와쿠’라는 것이 있다. 민폐라는 뜻으로 어려서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라는 것이 철저하게 교육된다. 어쩌면 타인에게 단 하나의 폐를 끼치는 것 또는 본인이 민폐가 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일본 전철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좌석 위에 올라가는 경우를 상정하여, 덧신을 준비하여 신게 한다. 흡연자는 개인 재떨이도 휴대하고 다닌다.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대화나 전화 통화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외면적 배려는 반드시 본받아야 한다.
미국인들은 일본인의 태도와는 조금 상이하다. 미국인의 개인주의는 “널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를 간섭하지 마”라는 명확한 조건부 묵계와 원칙이 있다.
7. 불감증 환자들의 천국, 대한민국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타인에게 불편을 주는 것을 민폐로 여기지 않고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나의 행동을 잘못이나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치 권리로 여기는 듯도 싶다. 남들이 예민한 것으로 치부한다. 지켜보는 관찰자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방관하고 있다.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바꾸어야 한다. "부끄럽습니다"로 바꾸어야 한다. 그것은 미안한 것이 아니라, 진정 부끄러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드시 본인이 불감증 환자는 아닌지 검진 받아 보아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는 불감증 환자들이 너무 많다. 이제는 세계 최초로, 의대에 ‘불감증 치료 학과’를 신설해야 한다. 그리고 전문의를 양성한다면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룰 것 같다. 불감증의 치료제는 상식과 양식이다. 참 시민을 만들어 주는 의술이 절실하다.
#꼰대전상서 #대중교통의무법자 #예민하시네요 #둔감하시네요 #불감증치료학과 #메이와쿠 #문화인 #문하인